"태릉 을 찾아서"
태릉(泰陵)은 조선왕조 제11대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 윤씨를 모신 능입니다.
강릉(康陵)은 제11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를 모신 능입니다.
이곳에는 태릉과 강릉이 함께 있으나 지금은 태릉만 공개 되고 강릉은 미공개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11대 중종의 능은 강남구 삼성동에 여러분이 선릉으로 알고 있는 선정릉에 있습니다.
여기도 선릉은 9대 성종의능( 연산군의 아버지)과 정릉 11대 중종의 능이 함께 있읍니다.
따라서 선정릉 혹은 능이 3개가 있다하여 삼능이라고도 합니다.
자.! 지금부터 저와함께 태능을 관람하시지요.
조선왕릉 40기는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2009.6.30 스페인 세비아에서 회의에서 등제되었습니다.
조선왕릉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놀라운 학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이북에 있는 제릉(태조 이성계의계비 신덕왕후릉)후릉(2대정종과 정안왕후릉)은 등제에 제외됐음
인종 독살설의 의혹 문정왕후(1501~1565) 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세상을 뜨자
2년 만에 그 뒤를 이을 계비로 간택된 이가 문정왕후이다.
사대부들의 표적이 되어 비난을 받았으며 인종 독살설에 휩싸이게 된다.
문정왕후는 열일곱에 왕비로 책봉된 후 17년 만에야 꿈에도 바라던 아들을 낳는다.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세자(인종)의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누구도 경원대군이 세자를 누르고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의 나이차였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며 세자를 핍박했다.
어느 날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불이 나 세자와 세자빈이 죽을 뻔 한 일이 있었다.
이를 '작서(灼鼠)의 변(變)'이라고 하는데,
문정왕후가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들여보내 불이 났다는 뜻이다.
문정왕후가 그만큼 세자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소문이다.
중종은 세자도 사랑했지만 문정왕후도 총애했기에
문정왕후를 감싸 안으며 방화 사건을 궁녀의 실수로 마무리지었다.
9대 성종 10 대 연산군 11대 중종(연산군의 이복형제) 의 왕후들.
원비는 비운의 단경왕후 중종이 왕이되나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하여 7일만에 쫏겨남.
(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근의딸.)
제 1계비 장경왕후(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음)
제2 계비 (문정왕후 후에 명종의 어머니)
조선왕릉 40기는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2009.6.30
스페인 세비아에서 회의에서 등제되었습니다.
조선왕릉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놀라운 학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단 이북에 있는 제릉(태조 이성계의계비 신덕왕후릉)
후릉(2대정종과 정안왕후릉)은 등제에 제외됐음
홍살문을 지나며 울퉁불퉁한 박석이 깔린 두길이 나옴.
왼쪽 약간 높은 길 은 신도(神道);신만이 다니는 길.
오른쪽은 어도(御道);임금이 다니시는길.
신하들은 맨 땅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을 당시의 나이는 열두 살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는데
이섭정 기간은 옥사의 연속이었다.
여왕 노릇을 하던 문정왕후였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는데 더 이상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것이다.
문정왕후의 유일한 손자이자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열세 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명종 재위 20년에 사망하는데,
이를 두고 <명종실록>에서는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가 명종에게 "내가 아니면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랴"하며 횡포를 부려
명종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었다면서 문정왕후를 사직의 죄인으로 적고 있다.
이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명종도 문정왕후가 사망한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2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1545년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하였다.
이때가 조선은 여인 천하로 만들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다행이였다.
중종은 : 등극한 뒤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시과, 사가독서,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세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개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가고있었다.
중종반정: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축이 돼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이들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 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중종은 :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 해서
훈구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림세력을 숙청 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있는 예는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합니다.
왕릉전시관에는 국장절차와 조선왕릉에 담긴 역사와문화,산릉제례를 포함한 왕릉의 관리 등을 한눈에 볼수있습니다.
11대 중종의 왕후들
원비는 비운의 단경왕후 중종이 왕이되나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하여 7일만에 쫏겨남.
(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근의딸.)
제 1계비 장경왕후(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음)
제2 계비 (문정왕후 후에 명종의 어머니)
단경왕후 신씨(1487 -1557년) :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 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식은 한명도 없으며 71세을 일기로 생을 마감.
사직공원 서쪽 병풍바위 아래에 있는 넓고 평편하게 생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자 성희언(成希), 박언종(朴元宗)등이연산군을 내치고 처남인 신수근(愼守勤) 형제를 살해한 후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중종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진성대군의 부인은 신수근의 딸로 박원종 등이「이미 부인 신씨의 아버지 등을 죽였는데
그 딸을 왕비로 두면 우리에게 보복이 올지도 모른다」하여 왕비되는 것을 반대, 부인 신씨는 인왕산 아래
옛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능 앞에있는 상석은 혼유석이라하며,
능의 주인인 혼이 밖에나와 놀도록 만든 무대임,제사용이 아님.
밑에 받침은 석고라하며 보통 4~5개가 받치고있음,
능주위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있으며. 석마를 항상 대동하고 있음,
언제든 왕명을 기다린다는 의미지요.
문정왕후의 무인석과 문인석은 키가 3미터가 넘으며,,, 귀골이 장대함
장
봉분앞에는 혼유석이 있고 장명등(석등)이 어둠의 세계를 밝혀준다는 의미지요.
곡장(굽은 담장)이 북,동,서에 둘러져있으며 남쪽은 트여있음,
봉분주위에 석양 석호가 쌍으로 호위하고 있음.
능위에서 내려본 서울 시가
신도비각 : 죽은 왕의 업적등을 적은 비문을 모신 전각
수복방 : 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의 숙소
오전일찍 관람했지만 너무더워요.!
정자각 밑에서
태릉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많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