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릉은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지번금곡동 141-1)에 위치해 있다.
침전 전경 향로와 어로 양 옆석물상(유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마석 좌 우 4基,
낙타석, 해태석, 사자석, 상석, 기린석 각 좌 우 2基)으로 조선왕릉에서 볼 수 없는 석물이 들어서고
정자각은 일자형 침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태조(주원장) 효릉의 방식을 따랐다며 대한제국 황제의
위용을 과시했다.
조선 왕조 마지막 왕릉인 제27대 순종(1874~1926)의 유릉도 황제 능으로 조성되었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광무 1년(1897) 대한 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황제가 되었다.
순종은 일본의 꼭두각시로 변한 친일파들에 의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다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주재로 열린 어전 회의에서 한일병합 조약 조인을 거쳤는데 문제는
황제인(옥쇄)의 날인이었다.
순정효황후 윤 씨(1894~1966)가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 조약의 날인을 강요 하자 옥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고 날인해 조선 왕조는 멸망한다
순종은 이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사망했는데, 장례는 도쿄의
국내성에서 주관해 일본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황제 장이 아니라 이 왕가가 진행하는 형식이었으며 장례 기간도 조선 왕조의 국상인
6개월이 아니라 한 달 반으로 짧게 했다.
순종의 하관일인 1926년 6월 10일은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고종의 장례 일에 3·1운동이 일어났듯 국부를 잃은 국민의 슬픈 감정이 독립 운동으로 결집되어
폭발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순명효황후 민 씨(1872~1904)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에 사망해 지금의 서울 능동 어린이공원에 모셔졌다가 순종 사망 후 천장했다.
순정효황후는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 씨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세의
나이에 동궁 계비로 책봉되었고, 1907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으로 격하되었으므로 그녀도 이왕비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에
머물렀으며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자 56세의 나이에도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로 알려진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해 슬픔을 달래다
1966년 72세로 창덕궁 석복헌에서 사망해 유릉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순종의 능묘는 현재도 많은 구설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릉이 명당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풍수지리상 매우 나쁜 자리에 있다고 한다.
조선 왕조를 일본에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로 불린 순종인데 왜 이러한 흉지에 안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이 부분에 관해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음모론을 펼친다.
흉지에 매장해 후손을 절손하고, 조선의 부흥을 꿈도 못 꾸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라는 것이다
누가 그런 음모를 꾸몄을까라는 질문에 김두규 박사는 일본 총독부만의 작품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제가 조선 황실의 후손이 번창하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있던 조선의 일부 대신이나 귀족 역시 한몫했을 거라는 설명이다.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곳에 장지를 선택한 것은 여러 집단의 묵계각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길지든 아니든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매장되어 있는 유릉은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
황제와 황후 2명의 현궁이 함께 있는 능으로, 이제까지 지켜졌던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제일 왼편에 황제의 재궁이 있어야 하나 이곳은 다르다.
중앙 순종, 우측 순정효황후, 좌측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두어 기존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중국 황제 능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릉은 능침, 침전, 홍살문 등이 직선형으로 배치된 홍릉과 달리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홍릉과 같은 황제 능으로 조성되었으므로 홍릉에 비해 능역의 규모가 다소 좁지만 석물은
홍릉에 비해 사실적이다.
순종의 능역을 조성하는 산릉주감은 조선인이었지만 실무자는 도쿄대 교수이면서 메이지신궁 등을
지은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였다.
일본인들은 유릉의 석조물을 일본식으로 조각하기를 고집했다.
1927년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유릉의 침전 앞 석물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기사가 실렸는데,
일제가 처음부터 조선의 전통 기술을 무시하고 문화를 짓밟으려 한 의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이들 석물은 예리하고 사실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창환 교수는 이것은 유럽의 조각 기술을 도입해 석고로 본을 떠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본 결과라고 혹평했다.
서구의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시험적으로 도입하면서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적 행위인데, 조선이나 중국의 문화는 쇠퇴하고 일본의 문화가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문·무인석은 현대적인 조각법을 인지한 조각가가 제작한 듯 정교하고 세밀하기는
하나 근거 없는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표정도 없다.
문인석은 눈망울도 없다. 마치 앞 못 보는 사람을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이다.
다른 것은 사실적으로 조각하면서 그렇게 조각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지적도 있다.
입구에는 항상 홍살문이 있다
웅장하게 보이는 침전
수복방
침전에서 내려다본 홍살문
재수상 차림표
침전뒤모습 우측에 유릉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릉을 볼수가 없다
침전 전경 : 향로와 어로 양 옆으로 조선왕릉에서 볼 수 없는 석물이 들어서고 정자각은 일자형
침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태조(주원장) 효릉의 방식을 따랐다며 대한제국 황제의 위용을 과시했다.
유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