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경 궁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하였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함인정 자리에는 1484년(성종 15) 인양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함인정은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고, 1830년(순조 30)에 불타 없어졌다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되었다.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한국의 전통 한복을 체험하는 외국인들이 한복을 곱게 꾸며입고
궁내을 다니고 있는 모습들이 많이 보이기도 한다